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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부칼럼]민심이 천심이다.
    [신윤균 칼러리스트] 인간은 이상과 현실의 두 축을 결코 도외시 할 수 없는 존재이다. 동 • 서양의 철학자들과 수많은 사상가들은 지금까지 이상추구, 현실중시, 이상과 현실의 조화라는 몇 가지 범주에 그들의 정신적 노력을 기울여 왔다. 중국 선진(先秦)사상에서도 그러한 면모를 읽을 수 있다. 도가의 노자와 장자가 이상 추구형이라면 법가인 한비자는 현실중시사상이며 유가 공자, 맹자는 이들에 비해 이상과 현실의 조화에 중점을 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유가 사상에서 공자, 맹자, 순자로 이어지는 선진유가사상은 도가와 법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상과 현실의 조화라는 특징을 나타내고는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다른 면모가 있다. 공자와 맹자가 이상에 비중을 둔 반면 순자는 현실의 중요성도 간과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 순자를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로 부를 수 있다.   상악설을 주장한 순자사상은 우리에게 매우 이질감이 있게 다나온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서 무엇 때문에 인간 본성을 성악설을 주장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당시 정치사상을 살펴보면서 이해를 한다면 우리에게 많은 이해를 가져올 수 있다.   순자는 인간의 욕망을 정치사회의 발생과 연계 지워 주장한 점, 즉 사회기원론을 제기한 점, 정통유가의 민본론을 계승하되 현능(賢能)정치의 실시를 전제로 한 혁명론을 주장한 점, 예치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공맹사상에서 도외시되었던 법의 중요성을 제기함으로써 후기 법가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점 등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순자 정치사상을 통해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점은 현능정치이다.   현능정치란 품성[賢]과 능력[能]이 뛰어난 지도자를 선발하는 것이다. 현능주의 정치체제는 오늘날 대의민주주의에서 대표를 선발하는 1인 1표의 선거제도에서 대표를 선발하여 그에 따르는 지도자들이 올바른 현능체제로서 운영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선택된 지도자들은 권위와 권력을 같게 된다.   권위(Authority)와 권력(Power)은 구분돼야 한다. 권위란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은 권력이며, 권력은 다른 사람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이다. 물론 권위에도 다양한 유형이 있으며 모든 권위가 ‘정당화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존중돼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질서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권력과 권위가 혼재된 사회에서는 마땅히 인정받고 존경받아야 할 권위도 불법적인 권력으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불법적인 권력에 대항하는 것은 민주시민의 의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러한 저항과 무분별한 권위에 대한 도전, 훼손은 마땅히 구분돼야 할 것이다. 정치적 지도자의 위치에 서려면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이(利) 보다는 의(義)를 지향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서도 개혁을 주장하면서 개인 이면(裏面)에서 의(義)라고 주장을 하면서 이(利)를 추구하다 개혁 군주인 정조에게 팽(烹)을 당한 홍국영의 사례를 알고 있다.   민심은 항상 위를 쳐다보고 있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것이 곧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이다. 민심이 이반되는 것은 자신의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항상 주변에서 말하는 것을 경청하고 자신의 도덕적 위치를 점검하면서 개인적으로 도덕적 • 윤리적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러한 자세를 통해 사회를 운영하여야 할 것이다.   전술한바 중국 춘추시대 혼란한 사회를 이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순자는 현능정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품성과 능력을 겸비한 지도자가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균형과 조화다. 민심은 결코 절름발이식 지도자를 통한 사회개혁을 원하지 않는다. 사회적 지도자는 법 이전에 도덕이라는 규범의 한계를 벗어나서는 결코 안된다. 이것을 지키지 않는 한 민심은 그것을 따를 수 없는 다른 길을 모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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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9-09-22
  • [기고]행복하기 - 당신은 행복한가?
    [김창규 (전)아제르바이잔 대사]헬조선이라는 말까지 유행하는 걸 보면 아마도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이는 열에 하나도 안 될 것이다. 그러우리는 왜 모두 불행하다고들 아우성일까? 행복의 사전적 의미가 부족한 것이 채워졌을 때 느끼는 감정이라 하니,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뭔가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감정은 절대적인 부족에서도 올 수 있고 상대적인 부족에서도 올 수 있을 것이다. 또 실제로 부족한데서도 올 수 있고 부족한 상태로 빠질 수 있다는 공포에서도 올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복지 사회에서 절대적인 부족은 나라에서 채워줘야 할 일이다. 반면, 상대적 부족은 남과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니만큼 나라가 담당할 영역이 아니라 개인의 영역이다. 행복은 '자유로움'이라는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자유롭다는 말은 행복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도 소극적인 자유는 나라에서 보장하는 것인 반면 적극적 자유는 개인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소극적 자유는 기본권과 같은 것이고 적극적 자유는 마음 수련을 통해 얻어지는 자유로움이다.   절대적 부족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다룰 문제이니만큼 언급을 생략하고 개인의 영역인 상대적 불행문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현대인들의 불행 중 상당 부분은 상대적 부족에서 온다고 한다. 상대적 불행은 채우기보다 비우기로 치유된다. 비우고 나누는 데서 우리는 상대적 빈곤감을 줄일 수 있다. 자꾸 채우려고만 하면 채운 걸 가지고 남과 키재기를 하고, 남과 나누지 않는 이기주의 사회에서는 가진 자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 사이에 갈등이 심화된다.   한 10 여년 전에 한 공중파 방송에서 네팔의 무스탕 지역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다큐 형식으로 보도한 바 있다. 방송은 무스탕 사람들의 행복이 그들의 비우는 자세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비우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신조로 삼아 주검까지도 잘게 나누어 새들에게 다 먹여버리고 떠난다. 이들은 한 줌도 남김 없이 깨끗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 영혼이 이승에 대한 미련 없이 완전히 극락으로 옮겨간다고 믿는다. 철저히 비우는 마음의 궁극적 표현이다.   반면 현대인들은 채우는데서 행복을 찾는다. 모두가 채우려고만 하니 사회적 조화는 무너지고 갈등만 늘어난다. 개인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채우기만 하려는 자세는 욕심을 한없이 키움으로써 남과의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요인이 된다. 이런 이기적인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가진 것을 가지고 서로 비교하여 상대적 빈곤감을 증가시킨다.   부족할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공포도 현대인들을 불행하게 하는 큰 이유이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실제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불행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직장을 가지지 못할까봐 또는 가진 직장을 잃을까봐 불안해 한다. 또 노후에 돈이 없어 고생하지 않을까 불안해 한다. 이런 종류의 불안은 일차적으로는 정부가 실업보험이나 국민연금 등 정책적 수단을 통하여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도움이라는 것이 대개는 지원의 기간이나 규모에 있어 제한적이어서 개인 스스로의 대비가 필요하다. 직업을 신분의 상징처럼 여기는 우리의 마음만 바뀌어도 청년 실업 문제가 많이 풀릴 것이고 인간을 물질적으로 평가하는 속물 근성만 버려버려도 상대적 불행 문제는 상당히 완화될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들을 요약하면,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을 비우고 남과 조화하는 마음을 기르는 일인 것 같다. 적절한 물질적 수단의 확보와 함께 욕심을 절제하고 진정한 삶을 추구하는 데에 참된 행복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도 아레테의 실현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하면서 그 실천 방안으로 '관조하는 삶'을 제시했다.   관조하는 삶은 지혜로운 삶이다. 또 중용을 지키려는 품성을 강조한다. 절제할 줄 아는 품성이다. 플라톤의 적도(適度)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곧 남을 관용하고 배려하라는 말이니 유교의 중용이나 인(인)과 상통한다.   공자도 논어에서 배우고 익히는 것을 즐거움이라 하면서 ''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사는데 편안함을 구하지 않으며 ᆢ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라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행복으로의 궁극적인 길은 욕심의 절제와 남과 조화하려는 노력에 있는 것 같다. 욕심을 절제하고 남과의 조화를 위해 자신을 추스리는 일이야말로 현대인들이 행복으로 향하는 지름길인 것 같다.                                                                                                                                             김창규 (전)아제르바이잔 대사   김창규 (전)아제르바이잔 대사는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과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1984년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부 여러 부서와 카자흐스탄, 영국, 독일, 러시아, 벨라루스에서 근무 후 마지막으로 카르기스스탄과 아제르바이잔에서 대사직을 수행하고 2018년 퇴임하였다. 2019년 9월부터 고향인 세명대학교에서 강의할 예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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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29
  • [외부칼럼]고객 중심형 관광상품화에 중점을 두는 축제 기획 필요
    [신윤균 칼럼리스트]최근에 우리 제천의 상징으로 정착한 제천 국제 음악 영화제를 성숙한 모습으로 마무리 하였다. 원래축제의 의미는 모든 예술이 미분화 상태로 엮어져 있는 종합예술의 성격을 지닌 것이 축제다. 하지만 축제의 본래 의미 속에는 종교성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축제는 예술적 요소가 포함된 제의를 일컫는다. 축제는 애초 성스러운 종교적 제의에서 출발했으나 유희성을 강하게 지니게 되어 오늘날에는 종교적인 신성성이 거의 퇴색되었다. 하지만 축제라는 말 자체가 곧 제의와 놀이를 포괄하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종교적 요소를 떼어버릴 수만도 없다. 축제를 영어로는 보통 Festival이라고 하는데 이는 바로 예술적 요소가 가미된 제의를 일컫는다. 우리의 경우 축제라는 용어와 비슷한 것으로 제전·축전이라는 말도 있으나 이들이 정확하게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축제라는 용어는 옛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만들어진 조어로 생각되고 있다. 외국의 경우에서 축제를 첫째, 신성시하거나 경이로운 행사로서 특별한 관객에 의해 행해지는 것, 둘째는 중요한 산물의 수확이나 이벤트의 연중행사, 셋째는 좋은 예술품으로 연속공연이나 구성된 문화 이벤트는 종종 예술가 한 사람에 의해서나 한가지 장르로 열리는 것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축제의 테마들은 주로 역사적 문화적 특성과 가치가 있는 부분과의 관련성에 의해서 정해진다. 결국 축제는 전통과 맥을 같이 함으로써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니며 선대의 관습, 사고, 기술 등의 계승과 인수이고 현재성 속에 재발견 또는 창조되어 간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갖는 것이며, 또한 환경을 같이하는 속에서 형성, 성장된 생활의 결과이고 그들이 속해있는 자연적 환경과 역사적, 사회적 환경에 대처하고 적응하는 가운데 신앙과 지혜로 엮어낸 생활풍속을 의미한다고 할 때 축제란 전통성과 문화성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할 것이다.   축제의 정의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좁은 의미, 또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정의로서 지역과의 역사적인 상관성속에서 생성, 전승된 향토의 고유하고 전통적인 문화유산을 행사화한 것이다. 반면 넓은 의미의 정의로는 이러한 행사뿐 아니라 흔히 말해지는 문화제, 예술제, 민속예술 경연대회 등의 문화행사 전반이 포괄된다.   우리 제천에서 진행한 영화제는 넓은 의미의 축제로 볼 수 있다. 이런 영화제 축제 행사에서 외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문을 하여 매우 성공적인 행사가 되어서 제천사람으로서 자긍심을 느낄 수 있어 가슴 한 구석에서 기쁨의 감정을 가질 수 있었다. 이번 영화제 축제를 보면서 몇가지 제언을 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축제의 소비자라 할 수 있는 관광객의 관광동기 및 행태에 대한 시스템을 점검하고, 축제의 소비측면과 공급측면을 연결하여 축제의 고객 중심형 관광상품화에 중점을 두는 축제 기획이 필요하다.   둘째, 지역문화 매력성을 이벤트화하여 시너지효과를 높여야 한다, 셋째, 제천 지역성 특성을 살린 고대 농경문화와 근대 의병활동을 가치 창조하여 적극 개발한 연계 된 축제가 되어야 한다.   축제는 기존의 관광상품을 개발하는 것보다 비용절감의 효과가 크기 때문에 관광시설과 자본이 취약한 지역에서 선호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지역축제의 수익창출은 지역주민에게 환원되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으며, 지역에서 창출된 소득의 시너지효과는 물론 소득의 지역 외 누출이라는 부작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축제는 지역 간의 연계 혹은 지리적, 시기별로 상호교류 할 수 있다면 그 효과를 확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또한 지역축제는 축제 수요자의 선호형태에 의해서도 지역발전 사업의 하나로 인식된다. 시대가 변화되면서 축제 수요자는 자연적 특성, 문화유적, 박물관 등을 관람하는 정적 특성에서 직접 체험하고 참여하는 동적인 특성으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에 부응하여야 한다. 넷째, 영화제는 영화제 운영상 조건과 여건에 대한 체계적인 검토가 요구된다.   영화제의 운영내용은 우선 도시와의 접근성에 대한 검토, 깨끗하고 전형적인 지역 이미지의 유지, 지역주민의 성향과 특수성 반영, 지역의 특화산물의 발굴, 지역의 전통성에 대한 표출 등 종합적인 측면에서 검토된 이후에 세부적인 내용을 개설할 수 있어야만 한다. 또한 상황적, 환경적 특성에 따라서 변화의 가능성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발전지향적인 특성을 함축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축제는 기획부터 운영까지 축제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사고를 잘 조명하여 체계적인 시스템 운영을 통해 새로운 영화제 + 관광축제의 틀을 구축하기 바란다. 더불어 고무적인 것은 우리 제천 영화제에서 매우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준 면도 있다.   현재 우리는 일본의 경제침탈에 대하여 반일정서가 극에 치닫고 있다. 이런 반일정서에서 감정적 대립 보다는 한 단계 성숙한 자세를 보이준 제천이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일본 작품들을 상영하도록 한 것이다. 일본은 우리의 이런 성숙한 자세에 반하여 소녀상 작품 전시회를 전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표현의 자유인 민주주의 기본을 억압한 짓을 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역(逆)으로 생각하면 자신들의 일제 만행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 제천시의 영화제에서 보여준 모습은 의병의 본향으로서 의연한 모습으로 대인(大人)의 자세를 보여준 성숙한 민주시민의 자세를 보여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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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9-08-16
  • [외부칼럼]어렵고 힘들어도 후에 좋은 날을 위해 차분히 준비
     [신윤균 칼럼리스트] 역사(歷史)의 史를 분석하면 사람의 입인 口 에 사람을 뜻하는 사람인자인 人의 합성어로 사람의 입이다.  사관의 뜻이 있다. 이는 왕이나 관리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기록하는 것이다. 기록하는 사관은 매우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며 어떠한 경우라도 기록한 사실을 왕이나 관리들은 절대 볼 수 없다. 이는 역사 기록에 대한 객관성과 후대의 거울과 지표로 삼으려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주변 정세가 매우 복잡하고 어지러운 시기에 살아가고 있으며 살얼음판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우리 한반도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북한의 연일 미사일 발사, 중국, 러시아의 영공침입, 일본의 경제침탈, 미국의 방위비 증가 등 구한말 우리를 둘러 싼 정세와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앞에서 역사의 史에 대하여 문자적 해석을 하였듯이 우리 모습이 후대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 될 것이다. 120년 전 선대 모습에서 우리 모습은 다가오는 정세에 대하여 큰 틀의 변화에 몇명 위정자들과 일반 백성들 간의 소통은 없이 개인의 영달을 앞장세운 위정자들에 의해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롭고 극단에서는 나라를 이웃 일본이라는 무도들에게 헌납을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저항의 자세를 보이고 다시 국기를 찾게 되고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수많은 희생을 겪었다.   결과는 우리 자신의 노력에 의한 해방이 아닌 강대국의 전리품으로 해방을 맞이하였고 지금까지 이념 논쟁에서 분단된 상태로 같은 동족끼리 서로 전쟁도 겪으면서 분단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사실에만 집착 할 것이 아니라 사실에서 중요한 가치를 깨닫고 새롭게 닥쳐오는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위의 역사적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소통부재가 있었다는 것이다. 구한말처럼 소통이 없이 몇몇 위정자들에 의해 국가가 운영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해방이후 교육에서 민주주의를 많이 배웠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희생도 많이 했다. 민주주의에 가장 기본은 소통이다. 닥쳐오는 위기에서 우리가 혼연일체가 되어 극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소통이 잘되어서 어려운 난관을 극복 할 수 있다.   일본의 일부 극우파들의 비뚤어진 국가주의가 동북아시아 평화에 얼마나 많은 파장을 줄 것 인가는 지나가는 삼척동자도 잘 알 고 있다. 손자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연 일본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분명 일본은 우리에게 경제적 타격을 주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하고 경제보복을 한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대응을 제대로 준비하고 있는지 자문하고 싶다. 국민 정서에만 호소하여 극복하려 한다면 다른 문제를 야기 할 것이다. 좀 더 치밀하게 이성적으로 연구하고 극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실례로, 구한말 매일신보 양기탁 선생이 주도한 국채보상운동처럼 시작은 좋았으나 끝이 실패로 끝나지 않게, 철저히 준비된 일본 불매운동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고향 제천은 일본에 대해 어느 고장보다도 철저히 많은 피해를 본 지역이다. 1904년 제천시내를 몰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일본이다. 현재 일본의 만행을 보고 감정적이고 일시적인 행동으로 하는 반일 보다는 극일을 할 수 있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일본은 우리 보다는 경제적으로 세계 경제 3위 국가 이다. 대일 경제 의존도에 자생의 길이 있어야 한다. 위기는 또 다른 극복의 길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많은 피해를 받은 지역으로서 일본을 이길 수 있는 자세로 중국 고사에서 유명한 한신의 고사처럼 과하지욕(胯下之辱) 같아야 한다. 처음에는 치욕이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후에 대 장군으로 탄생한 것처럼 현재는 어렵고 힘들어도 후에 좋은 날을 위해 차분히 준비하면서 극복해야 한다. 특히 우리 제천은 이런 극일에 있어서 더욱 많은 노력을 하여야 한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 머물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었던 과거를 새롭게 도약하여 더욱 크게 발전하는 제천으로 성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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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9-08-06
  • [외부칼럼]고부가 상품으로 성장 할 것인가는 우리의 몫
    [신윤균 칼럼리스트] 인간을 이성적 존재라고 한다. 감정에 얽매여서 즉흥적으로 행동하기 보다는 심사숙고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적 사고(Reflex thinking)를 통해서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람에게는 직관(直觀)이라는 것이 있고 직관을 통해서 행위를 한다고 한다.   서양 철학자 칸트는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직관에서 행위를 하되 감정과 이성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 올바르게 행위 하는 것이 인간이 지닌 특성이다.   우리는 이러한 행위의 올바름을 위해서 많은 경험을 이야기 한다. 경험에는 직접 경험과 간접경험으로 나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 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간접 경험을 자주 이야기 하며 책 읽기를 권장한다.   이런 독서를 통해 새로운 관념이 생기고 관념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나선형 식으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 나간다. 나선형식 사고란 과거 지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새로운 것을 습득한다는 것이다. 매우 흥미 있는 제목의 책을 하나 소개 하려고 한다.   『포크는 왜 네 칼퀴를 달게 되었나』 라는 책이다. 저자는 ‘테크놀로지의 계관시인’이라 불리는 헨리 페트로스카 이며 현존하는 공학자이다. 『연필』에서 그냥 보기에는 단순해 보이는 인공물의 진화 과정을 추적하여 디자인과 발명에 적용되는 보편적 원칙을 밝혀낸 공학적 탐구를 좀더 확대시켜 집필한 역작이 『포크는 왜 네 칼퀴를 달게 되었나』이다.   1992년에 출간한 책으로서 ‘작은 물건에 큰 뜻이 숨어있다“라는 명언처럼 일상생활 에서 쓸모가 많지만 사소해 보이는 간편한 발명과 디자인에 얽힌 사회적 • 기술적 요인과 배경을 분석하여 모든 인공물의 발명 • 창조 • 혁신에 요구되는 기본 원리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개선의 여지는 항상 있다.‘ 라고 하면서 완벽하지 못한 인공물에 대한 비난을 하면서도 결국 적응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라고 한다. 저자는 우리에게 ’쓸모 있는 물건‘으로 두 가지 측면을 보여주었다.   첫째, 자연중심 기술이다. 자연을 스승으로 삼고 인류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의 해법을 모색하는 청색기술은 녹색기술의 한계를 보완할 가능성이 있다. 녹색기술은 환경오염이 발생한 뒤의 사후처리적 대응의 측면이 강한대 비하여 청색기술은 환경오염 물질의 발생을 사전에 원천적으로 억제하려는 기술이다.   흔해 빠진 물건에서 위대한 디자인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안목을 배운 다면, 위대한 발명가인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거나 자연을 모방해서 친자연적인 물건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둘째, 융합(convergence)이다. 서로 다른 학문 • 기술 • 산업 영역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주제에 도전하는 지식융합, 기술융합 등 새로운 가치 창조의 원동력이 있어야 한다. 산업융합에서는 기술 • 제품 • 서비스가 서로 융합하여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시대이다. 대표적인 예로, 스티브 잡스의 휴대폰이다. 인문학적 상상력을 정보기술에 접목한 잡스의 융합적 사고방식이 세계시장을 석권한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전술한 나선형식 사고의 전환으로 하나의 예를 들어본다면 우리 고장은 한말 의병의 본향이라는 자부심을 자부심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품화로 진보하여야 할 것이다. 한말 의병의 유형에는 여러 유형의 의병이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 고장의 의병은 의병의 최고봉인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상적 기틀을 가지고 있다. 한말의 유명한 華西學派로서 華西 李恒老를 중심으로 한 한말 의병으로 하나의 인문학적 가치를 가지고 제천이 주창하는 한방과 연계한 융합산업의 융성이 필요한 것 같다.   얼마 전 우리 고장 제천의 청풍 호반에 개장한 케이블카에 대한 주변 관심이 증대하여 많은 관광객이 다녀갔다. 다녀간 관광객이 일회성인지 아니면 다시 찾는 관광객으로 발전을 하여 우리에게 높은 고부가 상품으로 성장 할 것인가는 우리의 몫이다.   관광산업은 꿀뚝이 없는 산업으로 우리에게 가장 친환경적인 산업이다. 이런 좋은 자원을 어떻게 활용을 하여야 우리 제천의 먹거리로 제2의 번영기를 맞을지에 대하여 심사숙고하여 고심을 하여야 한다.   현재 관광산업은 doing + being + seeig = healing 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원은 우리 주변에 많다. 의병이야기, 약채락의 건강한 음식, 청풍호, 의림지, 제천 중심의 여러 비경들, 한방 건강 이야기 등을 어울릴 수 있는 자원을 현대인들이 쉬면서, 정신건강과 더불어 육체적 쉼, 교육적 가치 활용을 한다면 단순히 먹고, 마시고 , 놀고 보다는 좀 더 즐기고, 느끼고, 다시 찾고 제천으로 우리 고장이 슬로건으로 내놓고 있는 ”자연 치유 도시 제천“과 가장 적합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가장 깨끗하고 주변 환경이 쾌적한 환경 친화도시로 성장을 한다면 다시 찾아오는 제천시가 될 것이다. 주변 인프라가 부족하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워진 한경 인프라를 더욱 승화 시킨다면 한 번 더 발전하고 우리 스스로를 성장하게 하는 발판이 될 것이다. 결국 이러한 발전은 위에서 언급한 나선형식 사고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사고의 고착(Fixed)은 우리 제천발전에 긴급히 없어져야 할 최대의 적폐일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9-08-02
  • [내부칼럼] 지나친 소비 = 작은 낭비
    [중부저널=김서윤 편집인] 우리가 어리고 초등학교 다닐 때 많이 듣던 이야기가 아직도 생생하게 생각나는 용어들 몇 가지만 적어보면 반공, 방첩, 승공, 그리고는 국산품 애용 ,물산장려 들이 생각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연필을 깍아야 하는 연필의 품질 원래 연필의 질량이 그런 줄만 알던 시대, 요즘의 불매운동과 신국산품 애용이니 하는 온통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는 운동이나 트럼프 미국 대통령 보면 국산품애용만이 애국자라는 옛말이 생각난다.   원래부터 J 나라 제품은 안 좋아 했는데 요즘은 앞에 J 가 지나가면 운전자를 한번 째려 보고싶다. 물론 세상은 바뀌고 크는 아이들의 생각도 많이 바뀌어 소비나 품질을 애국심에 호소하는 시대는 지났다.  다만 소비와 낭비의 혼돈을 이해하는 국민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가 옛날에 돈을 물 쓰듯이 한다 하였다. 물 소비를 낭비의 대명사처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수 값이 기름 값 보다 비쌀 때가 있다.  세차장에서 세차를 하느라고 물을 많이 사용한다고 낭비라고 할 것인가 말이다. 아무리 적게 쓰더라도 필요 없는 것을 쓰게 된다면 그것을 낭비라 해야 된다.   지금은 자기가 불편하면서 까지 절약하라고 한다면 실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에너지하면 대표적인 것이 물과 전기. 기름이라 하겠다. 예를 들면 에어콘을 과도하게 틀고 운전을 하면 기름이 많이 소비되오니 틀지 말라는 이야기 가 통하는 시대는 지나고 말았다.   국민소득이 삼만 불 시대를 맞이하여 안락한 문화생활과 레저 활동 등으로 소비하는 것은 그거야 말로 소비의 미덕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특히 자동차의 경우 5분 아니면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자리를 비우면서 공회전 시키는 경우를 너무나 자주 목격한다.  공회전 시킬 경우를 계산해보자 우선 연료의 낭비는 물론 연료를 만들기까지의 에너지 낭비, 매연 및 배기가스에 의한 환경오염발생, 자동차의 휴식시간이 없으므로 기계의 수명 단축, 이거야 말로 낭비중의 낭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음식물 쓰레기 처리방법이야 말로 참으로 쉽지 않은데 이제는 잔 밥을 가축에게 먹이는 것도 위법이라 하지 않는가 말이다. 우리 주당들의 회식이나 모임에 가면 어떤가?   그저 다 비우지 않고 따르다 말은 많은 술병들이 계산대에 올라가는 낭비, 삼겹살 등을 다 먹지 못하면서 꾸어서 산더미처럼 남기는 양반들, 낭비의 국가대표 선수, 어릴 때의 모순된 생각과 행동, 습관으로 빚어지는 후진국형의 국민의식 하루아침에 전부를  바뀌기는 힘들 것이고 실천하기 쉬운 것부터 나 부터라는 솔선수범하는 국민의식을 발휘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결국 진정한 낭비는 너도 나도 도움이 안 되는 것 그야말로 적폐 중에 적폐라 생각한다. 이제는 국민소득만 자랑 할 것이 아니라 선진화된 국민의식을 자랑 할 때라 생각한다.  김서윤 중부저널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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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30
  • [외부칼럼]무분별한 응전보다는 냉정한 시각으로
    [신윤균 칼럼리스트]현재 우리사회는 내 • 외적 으로 많은 내홍에 쌓여 있다. 무엇인가 가슴을 펑 뚫어 주는 시원한 소식은 없고 서로가 자기 이론과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며 泥田鬪狗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고 하는 것은 동물과 다르게 이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이성이 있다는 것은 가치를 평가할 수 있고 감정이 치우치며 행동하기 보다는 생각을 통해 바른길을 갈 수 있는 행동을 하며 올바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특성을 가진 인간들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며 서로 어울려 삶을 영위한다. 또한 이런 삶 속에 공자는 논어 술이편에서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삼인행 필유아사언 택기선자이종지 기불선자이개지), 몇 사람이 함께 일을 하게 되면 그 중에는 반드시 본받을 만한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장점을 취하여 배우고 그 단점은 가려내어 고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여러 사람과 어울리게 되면 그 가운데는 내가 본받을만한 행동이나 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사회에는 그 사회를 이끄는 opinion leader 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리더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구한말 서세동점의 시대에 우리 지도자들의 막힌 사고로 인해 우리역사에 얼마나 많은 오점을 남기었는가, 그런 역사적 반성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 또 한번 겪는 다면 우리 후손들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우리스스로 반성을 해보아야 하다. 특히, 이분법, 흑백논리, 패배주의 같은 사고들이다.   우리 제천은 항상 자랑으로 여기는 구한말 의병의 본향으로서 단순히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의병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라를 지키는 구국의 이념을 넘어 우리의 강점과 단점을 빠르게 파악하고 주변의 정세와 시대적 흐름의 파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여야 한다.   맹자의 고사중 고자편을 보면 魚我所欲也 態掌 亦我所欲也(어아소욕야 태장 역아소욕야) 二者 不可得兼 舍魚而取態掌者也(이자 불가득겸 사어이취태장자야)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생역아소욕야 의역아소욕야) 二者 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이자 불가득겸 사생이취의자야) 이 내용을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생선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곰 발바닥도 원하는 것이지만, 이 모두를 동시에 얻을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생(生)도 원하는 것이고 의(義)도 원하는데, 둘 다 취할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生과 義에서 捨生取義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義에 대한 의미를 잘 새겨야 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유교의 덕목 가운데 하나이며, 인간의 행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이행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수치를 알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며, 맹자는 스스로의 불선(不善)을 부끄럽게 여기고 남의 불선을 증오하는 마음, 즉 정의심(正義心)을 의의 발단(發端)이라고 했다. 송학(宋學)에서는 마음의 제(制), 즉 마음속에서 일의 가부(可否)를 재결(裁決)하여 가(可)에 따르고 부(否)를 물리치는 일, 다시 말해서 사리(事理)를 분명히 함을 뜻했다.   義는 분명 사전적으로 사리분별에 있다. 사리분별을 한다는 것은 분명 매사 처리에 분명하고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일을 처리한다는 것이다. 사리분별을 통한 자세는 한다는 爲己之學이 자세를 가져야 한다. 즉, 자신의 사리사욕이 아닌 봉사의 자세를 가지고 현재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미래 바른 모습으로 지향하여야 할 것이다.   도전과 응전의 시대에서 닥쳐오는 도전에 몽고 징키스칸은 닥쳐오는 도전에 대하여 미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응전을 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는 땅 만 정복하면 된다는 식의 안주형 응전으로 그 후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 제천은 현실 안주형으로 남들이 하면 뛰따라 가는 식의 대응은 항상 뒤쳐진 자세의 제천의 미래가 될 것이다. 혼돈의 시대에 대책이 없는 무분별한 응전보다는 냉정한 시각을 가지고 바른 대책으로 응전을 한다면 우리 제천의 모습은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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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2
  • [외부칼럼]제천시는 미래를 여는 4번째 사과를 만들어야 한다
    [신윤균 칼럼리스트]현재 우리는 미래학자인 엘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지나 제4의 물결로 인공지능, 빅데이터, 알파고, 사물인터넷 등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소리 없이 우리의 주변에 다가오고 있다. 이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하여야 우리 제천시가 대처 할 수 있는가 능동적인 자세인가, 수동적인 자세인가가 향후 우리 제천시의 모습일 것이다.   현재 만족에 안주하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더 이상의 발전은 있을 수 없다. 실례로 일본 메이지 천황과 우리 조선 고종은 같은 나이이고 왕으로 등극한 년도도 아이러니 하게 같다. 일본 천황은 미국의 무력 앞에 굴복하여 개항을 하고 우리는 주자학적 매너리즘에 빠져 쇄국정책으로 일관 한 결과 한 • 일 양국의 현재 모습은 나비효과(butterfly effect)같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런 역사적 교훈에서와 같이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현재 우리 제천시가 역동적으로 여러 산업단지를 유치하여 새로운 활력의 길을 모색하려고 많은 힘을 집중하고 있는 상태이다. 산업화 개발 시대의 제천의 산업은 충북 북부 중심의 산업으로 시멘트, 각종 광산물, 교통의 요지로서 많은 발달을 하였으나 정부의 산업 정책의 변화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걷고 있으며 이에 대한 극복으로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통해 새로운 방향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유명한 철학자 헤겔의 '세 개의 사과'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종교와 예술과 과학을 사과와 관련성 있는 이야기로 표현한 것이다. 사과는 현재 7500개의 품종이 있으며 년 간 생산량은 7천만 톤에 육박한다. 사과가 신들에 영역까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태고적부터 인류와 함께 한듯하다. 이렇게 인간에게 가장 널리 사랑받는 과일 중에서 사과 세 개가 세상을 바꾸었다.    첫 번째 사과는 에덴동산의 사과이다. 에덴동산의 지혜의 열매이며, 밀튼의 '실락원'에 나오는 이야기다. 성서에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에 빠져서 지혜의 열매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지상낙원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이다. 정확히 말하면 선악과이지만 우리는 사과라고 흔히 알고 있다. 그 열매가 사과였다는 것을 보면 사과가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된 것인지 잘 설명해주는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에덴동산의 사과 이야기는 ‘신으로부터 독립한 인간’을 뜻이기도 하다.   두 번째 사과는 뉴턴의 사과이다. 뉴턴의 통찰은 처음 세상에 선을 보일 때부터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뉴턴의 코앞에서 사과가 떨어졌을 때 마침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다. 뉴턴은 과일이나 우리 인간은 모두 공중에서 땅으로 떨어지는데 저 위성은 어떻게 창공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뉴턴은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지구의 인력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 만유인력설을 주장하여 과학사에 일대 전기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뉴턴역학은 예나 지금이나,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뉴턴으로부터 대자연의 코드를 읽게 된 인간은 드디어 환경을 개발하고 이용하게 된다. 진정 이것이 바로 자연을 지배하는 혁명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무튼, 뉴턴이 명상을 하던 사과나무는 널리 알려지게 돼 18세기 말 울스토로프의 사과나무 중 특별한 한 그루에 ‘사과가 떨어진 나무’라는 표지가 붙었다. 1820년경 그 나무는 완전히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 나무로 의자를 만들었는데, 그 의자는 아직도 보존돼 있다.    세 번째 사과는 빌헬름 텔의 사과로서, 스위스는 한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의 지배를 받아 왔다. 이 무렵 스위스인들은 오스트리아에서 파견한 관리들의 압박정치에 매우 시달렸다. 활의 명수인 빌헬름 텔은 이에 항거하여 총독의 노여움을 샀다. 텔은 항명(抗命)에 대한 처벌로 자기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놓고 그것을 활로 쏴 떨어뜨리라는 명령을 받는다. 텔은 멋지게 사과를 쏴 떨어뜨렸지만, 만일 실패할 경우 게슬러를 쏘기 위해 몰래 준비했던 화살이 발각된다. 텔은 체포되어 성으로 끌려가다가 도망쳐 길가 숲에 잠복해 있다가 총독를 쏴 죽이고 스위스독립을 이끈다. 이는 억압과 인간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이 이야기는 J.C.F.실러의 희곡과 G.A.로시니의 오페라로 더한층 유명해졌다.   이상의 3개 사과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제천시는 미래를 여는 4번째 사과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미래를 여는 4번째 사과는 요즘 각 분야에서 총성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고(故)스티브 잡스의 애플로고로서 “왜 먹다만 사과일까?”, '애플사의 제품을 맛보면 다른 제품을 쓰지 못한다'는 의미로 이해가 된다.   참으로 너무도 자신감에 찬 스티브 잡스의 오만함이다. 한때는 사람들이 잡스의 사과가 그 4번째 사과라고 치켜세웠다. 그런데 왜 요즘에는 아이폰 보다 안드로이드를 많이 쓰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잡스의 사과는 인류를 변화시키는 4번째 사과로는 이미 아닌 듯 싶다. 이러한 네 번째의 사과를 우리제천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있을 것 같다.   그동안 제천은 산업화시대에 자원을 개발하는 원산지로서 제천의 먹거리를 만들어 살아왔다. 이제는 먹어 버린 사과를 다시 재생을 하여 새로운 자원으로 사용 할 수 있는 네번 째 사과를 재생산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지구의 자정능력을 넘어선 개발로 인한 환경 재앙에 대한 대안으로 자원 순환이 절실히 필요하다. 네 번째 사과로 자원순환과 재생을 한다면 새로운 사업으로 지구의 장래를 밝힐 수 있는 제천의 모습으로 멋진 신세계로 새롭게 탄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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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19
  • [내부칼럼]하소천 물 치유사업
    [중부저널=김서윤 편집인]오래전 이야기로만 생각되는 용두천 복개를 해체하여 청계천처럼 물이 흐르는 정부지원 사업을 두고 갑론을박 하던 생각이 난다. 지금도 어쩌다 택시를 이용하다보면 그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600억의 지원 사업을 포기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 하는 기사분도 만날 수 있었다. 작든 크든 공공사업의 계획에는 여러 가지의 의견이 있어야 되고 장시간에 거처 논의 되고 검토 되어야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 .   우리나라의 경우는 자기의 계획을 자기의 당대에 결과물까지 돌출하려는 양은 냄비 근성은 우리 국민의 성격 탓일까? 용두천의 경우는 용석의 강물을 취수해 물놀이를 하기에는 비용의 부담이 첫번째 부정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두번째는 주차난과 교통체증을 우려 하는 바가 큰 이유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하소천의 경우는 그런 이슈들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물이 흐르는 수량은 적지만 나름대로의 아기자기한 작품을 기대해볼만하다. 물을 잘 이용한다는 이수, 물을 잘 다스리는 치수라는 용어를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욕심을 부려본다면 친수기능, 친환경기능까지 고려되었으면 더욱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번 사업은 이수와 치수가 조화를 이룰 때 성공의 사업이라고 지금과 미래에 칭찬 받을 것이다.   사업을 하다 보면 대부분 이수에만 편중되는 경향이 있고 치수를 소홀이 하다 일반적인 장마비에도 망실되고 유실 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보며 씨브렁 거릴 때가 없지 않았다. 물론 천재지변에 준하는 100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하다고 할 정도의 변명의 여지가 있을 경우를 제외 하곤 말이다.   비온 다음에 땅이 굳어진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장마와 세월이 흐를수록 고풍과 세월이 정겨움을 주는 그런 아이디어 등등  그래서 설계 전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공받는 1단계 의견, 설계 후 수정에 따른 좋은 의견들을 수렴하는 2단계 의견 등의 서두르지 않는 준비로 시내로 강물이 흐르지 않는 도시들이 제천이 아닌 작은 지자체도 많다. 김서윤 중부저널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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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15
  • [외부칼럼]사실 속에서 새로운 안목을 가져야
    [신윤균 칼럼리스트]작금의 현실을 둘러보면 주변 환경이 광속도로 빠르게 변화되고 있다. 우리 주변을 보면 고도 성장기에는 앞만 보고 살아가면서 어떻게 하던지 가난을 극복하고 주변 다른 나라들과 같이 선진국 대열에 가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고 편안한 생활을 하면서 행복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참고 참고 인내의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인간 기본적 인권은 뒷전에 보고 그저 앞만 보고 달려왔다.   우리는 이제 가난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서 뒤를 돌아보고 앞을 새롭게 설계하면서 살아가야하는 존재에 놓여 있다. 서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인간의 실존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실존 즉,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면서 실존주의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신 앞에선 단독자’라는 인간의 의미를 부여하고 마르틴 부버 라는 철학자는 만남의 철학을 이야기 하는 등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하였으나 아직도 그에 대한 대답을 못 구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성리학의 이념이 도덕의 주체로서 가장 근저에 생활 규범을 크게 차지하고 있다. 현존하는 지폐의 주인공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세종대왕, 신사임담 으로 유교적 관념에서 성군, 조선을 이끌어온 두 유명한 학자, 율곡의 모친으로 유교적 이념에서 훌륭한 인재로 주류를 이룬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반론을 재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나 이에 대한 우리의 반성적 모습이 필요로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유학의 주가 공자, 맹자, 주자로 이어지는 것이 유학을 모두라고 보는 것이다. 유학이라는 이념도 엄연히 춘추전국시대의 하나의 제자백가 사상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과 다른 사상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하여 사장(死藏)을 시키고 하나의 순혈적 생각을 가지고 마치 신라의 골품제도 같은 생각으로 사고의 주류를 이끌어 다른 사상은 근접도 못하게 하여 다른 사상적 교접이 없이 오직 하나만을 강조하는 사고의 고착성(Fixed)은 서양의 과학철학자인 칼 파퍼의 지적대로 열린사회의 적들이다. 사상을 유연성(Flexible)이 있어야 한다.   우리 역사책을 보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양란 이후에 사상적 주류를 이룬 것이 실학사상으로 이어진 것처럼 책이 기술되어있다. 실상은 이런 실학사상은 육당 최남선이 일본이 내선일체의 문화 식민지에서 식민사관에 대척하기 위해서 우리도 이러한 사상이 있었다고 발굴하여 시작한 것이다. 실학사상이 대두되던 시기에 실학사상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좌파적 성격이다. 주류의 성리학은 양란 이후 성리학적 매너리즘과 양반 사대부의 집권 정당성을 지지해주는 이념으로 이기론 이후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등을 가지고 대답 없는 메아리로 공리공론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에 반기를 든 잔반들, 몰락한 남인계열, 서얼들이 모여서 유학에 대한 실사구시, 이용후생, 경세치용이라는 학문적 기치를 들과 새로운 학문의 반성으로 성호 이익을 필두로 하여 다산 정약용까지 이어져 나갔다. 이에 개혁 군주인 영조, 정조 이후 반짝 대두 되었으나 이후 서인 세력들과 양반 사대부들의 반대에 부딪쳐 어느 한곳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역사적 사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교훈을 가져야 한다. 사실 속에서 새로운 안목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에 대한 이야기로 동양 고전인 장자(莊子)의 양생주에 나오는 포정의 비유를 소개 하고자 한다.   춘추전국시대에 포정(丁)이라는 솜씨 좋은 백정이 있었다. 어느 날 포정이 문혜군(文惠君, 기원전 371~335)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었다. 그가 소에 손을 올리고 어깨로 받치며, 발로 밟고 무릎을 굽힐 적마다 칼질하는 소리가 싹싹 쓱쓱 울려 퍼져 음악적인 가락을 이루었다. 문혜군이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오오, 훌륭하도다! 사람의 재주가 여기까지 미칠 수 있단 말인가. 어찌하면 기술이 이런 경지에 이를 수가 있느냐?”  그러자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로서 이는 손끝의 재주보다 뛰어난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만 보여 손을 댈 수 없었으나, 3년이 지나자 어느새 소의 온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마음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런 작용만 남습니다.   그러면 천리(天理)를 따라 쇠가죽과 고기, 살과 뼈 사이의 커다란 틈새와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소의 몸이 생긴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 기술의 미묘함은 아직 한 번도 칼질을 실수하여 살이나 뼈를 다친 적이 없습니다.   솜씨 좋은 소잡이가 1년 만에 칼을 바꾸는 것은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소잡이는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무리하게 뼈를 가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제 칼은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마치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저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을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을 움직이는 데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9년이 되었어도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군데, 뼈와 힘줄이 엉켜 있는 곳에 다다르면 그것이 어려운 일인 줄 알기 때문에 각별히 조심하여 눈은 한 곳을 응시하고 칼질은 더디어지고 칼놀림이 몹시 미묘해집니다.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듯 자연스럽게 일이 끝나면,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잠시 주저하다가 이내 흐뭇해져 칼을 닦아 넣어 둡니다.”  이 말을 들은 문혜군이 감동해서 말했다.   “훌륭하구나, 나는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養生: 자연의 이치를 좇고 의식적으로 행하지 않으려는 도가의 수련법)의 도를 터득했도다.”  포정해우(庖丁解牛)는 『장자』 「양생주(養生主)」에 나오는 말로서, 기술이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남을 비유할 때 쓴다.   이상의 고사에서 우리는 하나의 사실을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   주어진 일에 대하여 단순하게 다람쥐 첵바퀴 돌 듯이 하면 아무런 변화를 못 느끼고 하나의 단세포로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의 주어진 책무에 대하여 생각을 하고 원리를 깨우치는 것은 원리와 이치를 알면서 하면 세상사를 즐기면서 새로운 것을 창출 할 것이다. 이에 비하여 단순하게 주어진 책무만 했다고 하여 소신이 있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장자의 포정의 비유처럼 자신의 주어진 책무를 이해하고 원리를 알면서 책무를 수행하면 좀 더 좋은 사회로 이끌 것이다. 이런 창의적 사고는 멀리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주어진 자기 현실에서 수행을 하면서도 문제의식과 해결을 찾는다는 제천시민이 된다면 좀더 밝고 살기 좋은 제천을 건설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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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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